"나는 쇼펜하우어가 인간들 중 가장 천재적인 인물이라 생각하네" - 톨스토이
"매 문장마다 거부, 부정, 체념 등을 외치고 있었다. 나는 이 책에서 세계, 삶, 고유한 정서를 볼 수 있는 거울을 만났다. 정말 대단한 만남이었다. 나는 아무런 경향성도 없는 예술의 꽃을 보았고, 질병과 치료, 추방과 도피처, 지옥과 천국을 보았다. 자기 인식에 대한 욕구가 밀려들었다." - 프리드리히 니체

쇼펜하우어, 그는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강하게 생철학을 실현했고 인생의 가치와 인간의 의미에 대해 고찰했다. 최소 은수저를 물고 자라난 인물과는 전혀 정반대의 사상을 가진게 희대의 미스테리일 정도로 그가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마디로 '비관주의'이다.
쇼펜하우어는 1788년에 독일의 단치히에서 태어난, 염세사상의 대표적 철학자이다. 1809년 이래 괴팅겐 대학, 베를린 대학을 거쳐 1813년에는 예나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바이마르에서는 괴테와 친교를 맺었으며, 1820년에 베를린 대학 강사가 되었다.
그의 철학은 칸트의 인식론에서 출발, 피히테, 셀링, 헤겔 등 관렴론적 철학자들을 공격하고 있으나, 그 근본 사상과 체계는 같은 '독일관념론'에 속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데아론 및 인도의 베다 철학의 영향을 받아 염세관을 그 사상적 기조로 한다. 그의 철학은 19세기 후반에 들어 염세과의 사조에 영합, 일시에 보급되었다.
사람들은 쇼펜하우어를 염세주의 철학자로 기억한다. 그러나 직접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읽어본 사람은 얼마되지 않을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염세적이긴 하지만, 그의 철학은 매우 논리적이고 잘 따져 읽으면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다.
그는 삶의 고통, 불행, 궁핍과 같은 부정적 요소를 행복, 쾌락과 같은 긍정적인 요소보다 더 높이 평가한 철학자이다.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 내용이다. 허나, 쇼펜하우어의 말을 읽어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왜 인간은 고통과 불행이 없이는 살 수 없는지 우리는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은 모두 가질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은 모두 할 수 있고, 고통과 불행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금방 권태를 느낀다. 권태만큼 괴로운 지옥은 없다. 그러나 삶에 고통과 불행이 쾌락, 즐거움과 적당히 배합되어 있다면, 우리는 권태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여기에 더 나아가서 쇼펜하우어는 고통과 불행이 인간의 삶에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함을 설파한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건강할때는 건강함에서 오는 즐거움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병마에 시달리면, 쉽게 고통을 느끼고, 병마에 이기기 위해 행동한다. 즉, 행복이나 쾌락보다 인간은 고통을 더 잘느끼고 더 잘 기억한다.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고통과 불행의 감정을 중요시한 이유이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 이다.
인간은 현재 행복할지라도 미래에 어떤 재난이 닥칠지 모르는 존재이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의 단점은 그것이 아니다.
인간을 제외한 생물들은 모두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현실에만 충실히 산다. 당장 내일 강한 생명체로부터 목숨을 빼앗길지라도 다른 생물들은 미래에 있을 위협에 대해서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미래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걱정한다. 그것이 인간의 가장 큰 단점인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놀라운 점은 그 흡입력이다. 나의 생각들은 그에게 어느정도 공감 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철학이 염세적으로 느껴진 것은 어쩌면 그동안 사람들이 행복에 대해 지나치게 환상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행복과 쾌락만 있다면 인생이 천국처럼 될 수 있을것이라는 순진한 환상을 쇼펜하우어가 깨주는 큰 역할을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존경 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의 단점은, 사람들이 그의 철학을 염세적으로만 느끼게 했다는 점이다.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고통일지 모르지만, 그 고통은 누구나 가지고 있고 매우 흔한 것이고, 견딜만한 것들이다. 그리고 그 고통이 권태로부터 해방시켜주고, 삶에 긴장감을 준다. 그의 말대로 인간의 생은 지옥일지 모르지만 살만한 지옥이다. 그리고 인간은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즉 인식의 차이에 따라 지옥도 천국으로 바꿀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만족이라고 부른다.
쇼펜하우어의 생각들은 부정적인 냄새가 많이난다. 하지만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의미가 불행하기만하고 무의미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존재 목적이 행복이었다면 현실세계의 모습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삶을 더 자세히, 편견없이 들여다본다면 세상은 우리가 행복을 느끼지 못 하도록 고안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해지는데 실패하고 나면 그 만큼 더 불행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는 세계가 지옥같은 곳일지 모르나, 그 고통은 우리가 구원을 향해 부단히 자신의 운명을 밀어붙임으로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달성하도록 돕고 있다고 봤다. 이로써 고통이 무언가에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겪는 고통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게 아니다. 나름의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이 맹목적인 행복이 아닌 것은 명백해진다.
오래 산다는 것이 점점 더 나빠지는 삶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옳은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삶의 고통을 충분히 감내할 수 있도록 진화했다.
앞에서 쇼펜하우어가 고통의 효용에 대해서 이야기 했던 것처럼, 적당한 고통은 삶에 긍정적인 긴장감을 주지 않을까? 때에 따라 고약한 것도 좋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살아갈 만하고 목적이 있는 지옥이다.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철학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내용도 곧 삶의 만족도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으며, 삶은 유한하므로 끊임없는 고뇌와 성찰 그리고 실현을 통해 본인의 이상적인 참된 삶을 살라는 것 아닐까
박동진
"나는 쇼펜하우어가 인간들 중 가장 천재적인 인물이라 생각하네" - 톨스토이
"매 문장마다 거부, 부정, 체념 등을 외치고 있었다. 나는 이 책에서 세계, 삶, 고유한 정서를 볼 수 있는 거울을 만났다. 정말 대단한 만남이었다. 나는 아무런 경향성도 없는 예술의 꽃을 보았고, 질병과 치료, 추방과 도피처, 지옥과 천국을 보았다. 자기 인식에 대한 욕구가 밀려들었다." - 프리드리히 니체
쇼펜하우어, 그는 매우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강하게 생철학을 실현했고 인생의 가치와 인간의 의미에 대해 고찰했다. 최소 은수저를 물고 자라난 인물과는 전혀 정반대의 사상을 가진게 희대의 미스테리일 정도로 그가 인생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마디로 '비관주의'이다.
쇼펜하우어는 1788년에 독일의 단치히에서 태어난, 염세사상의 대표적 철학자이다. 1809년 이래 괴팅겐 대학, 베를린 대학을 거쳐 1813년에는 예나 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다. 바이마르에서는 괴테와 친교를 맺었으며, 1820년에 베를린 대학 강사가 되었다.
그의 철학은 칸트의 인식론에서 출발, 피히테, 셀링, 헤겔 등 관렴론적 철학자들을 공격하고 있으나, 그 근본 사상과 체계는 같은 '독일관념론'에 속한다.
그러나 플라톤의 이데아론 및 인도의 베다 철학의 영향을 받아 염세관을 그 사상적 기조로 한다. 그의 철학은 19세기 후반에 들어 염세과의 사조에 영합, 일시에 보급되었다.
사람들은 쇼펜하우어를 염세주의 철학자로 기억한다. 그러나 직접 쇼펜하우어의 저서를 읽어본 사람은 얼마되지 않을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염세적이긴 하지만, 그의 철학은 매우 논리적이고 잘 따져 읽으면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다.
그는 삶의 고통, 불행, 궁핍과 같은 부정적 요소를 행복, 쾌락과 같은 긍정적인 요소보다 더 높이 평가한 철학자이다. 쉽게 수긍이 가지 않는 내용이다. 허나, 쇼펜하우어의 말을 읽어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왜 인간은 고통과 불행이 없이는 살 수 없는지 우리는 이미 경험했기 때문이다.
자기가 갖고 싶은 것은 모두 가질 수 있고, 하고 싶은 일은 모두 할 수 있고, 고통과 불행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금방 권태를 느낀다. 권태만큼 괴로운 지옥은 없다. 그러나 삶에 고통과 불행이 쾌락, 즐거움과 적당히 배합되어 있다면, 우리는 권태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여기에 더 나아가서 쇼펜하우어는 고통과 불행이 인간의 삶에 더욱 적극적인 역할을 함을 설파한다.
예를 들어서 우리는 건강할때는 건강함에서 오는 즐거움을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병마에 시달리면, 쉽게 고통을 느끼고, 병마에 이기기 위해 행동한다. 즉, 행복이나 쾌락보다 인간은 고통을 더 잘느끼고 더 잘 기억한다. 이것이 쇼펜하우어가 고통과 불행의 감정을 중요시한 이유이다. 상당히 설득력 있는 이야기 이다.
인간은 현재 행복할지라도 미래에 어떤 재난이 닥칠지 모르는 존재이다. 그러나 진정한 인간의 단점은 그것이 아니다.
인간을 제외한 생물들은 모두 앞을 내다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들은 미래를 걱정하지 않는다. 현실에만 충실히 산다. 당장 내일 강한 생명체로부터 목숨을 빼앗길지라도 다른 생물들은 미래에 있을 위협에 대해서 미리 걱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인간은 미래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면서 걱정한다. 그것이 인간의 가장 큰 단점인 것이다.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놀라운 점은 그 흡입력이다. 나의 생각들은 그에게 어느정도 공감 할 수 밖에 없었다. 그의 철학이 염세적으로 느껴진 것은 어쩌면 그동안 사람들이 행복에 대해 지나치게 환상을 가지고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행복과 쾌락만 있다면 인생이 천국처럼 될 수 있을것이라는 순진한 환상을 쇼펜하우어가 깨주는 큰 역할을 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그는 존경 받을 만하다.
그러나 그의 단점은, 사람들이 그의 철학을 염세적으로만 느끼게 했다는 점이다. 인간의 삶은 그 자체로 고통일지 모르지만, 그 고통은 누구나 가지고 있고 매우 흔한 것이고, 견딜만한 것들이다. 그리고 그 고통이 권태로부터 해방시켜주고, 삶에 긴장감을 준다. 그의 말대로 인간의 생은 지옥일지 모르지만 살만한 지옥이다. 그리고 인간은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즉 인식의 차이에 따라 지옥도 천국으로 바꿀 수 있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만족이라고 부른다.
쇼펜하우어의 생각들은 부정적인 냄새가 많이난다. 하지만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가 겪는 고통의 의미가 불행하기만하고 무의미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인간의 존재 목적이 행복이었다면 현실세계의 모습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우리가 삶을 더 자세히, 편견없이 들여다본다면 세상은 우리가 행복을 느끼지 못 하도록 고안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우리가 행복해지는데 실패하고 나면 그 만큼 더 불행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는 세계가 지옥같은 곳일지 모르나, 그 고통은 우리가 구원을 향해 부단히 자신의 운명을 밀어붙임으로 우리가 우리의 운명을 달성하도록 돕고 있다고 봤다. 이로써 고통이 무언가에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겪는 고통이 전혀 의미가 없는 게 아니다. 나름의 목적이 있고 그 목적이 맹목적인 행복이 아닌 것은 명백해진다.
오래 산다는 것이 점점 더 나빠지는 삶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은 옳은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간은 삶의 고통을 충분히 감내할 수 있도록 진화했다.
앞에서 쇼펜하우어가 고통의 효용에 대해서 이야기 했던 것처럼, 적당한 고통은 삶에 긍정적인 긴장감을 주지 않을까? 때에 따라 고약한 것도 좋을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는 살아갈 만하고 목적이 있는 지옥이다.
쇼펜하우어가 자신의 철학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내용도 곧 삶의 만족도 인간의 의지에 달려 있으며, 삶은 유한하므로 끊임없는 고뇌와 성찰 그리고 실현을 통해 본인의 이상적인 참된 삶을 살라는 것 아닐까
박동진